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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역사유적지구  사비시대(익산)  왕궁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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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비쥬얼

금제관식 (무령왕릉 출토) 금제뒤꽃이(무령왕릉 출토) 허리띠장식(무령왕릉 출토) 금동제신발(무령왕릉 출토)

왕궁리유적

왕궁리유적

왕궁리유적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다. 왕궁리유적은 백제 왕실이 수도 사비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만든 복도 유적이다.
용화산에서 시작하는 능선의 말단부에 형성된 낮은 구릉 위에 만들어졌다.

높은 곳은 깎아 내고, 낮은 곳은 성토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왕궁이 들어설 공간을 마련하였다. 담장이 들어설 지점은 바깥쪽을 경사지게 깎아내서 왕궁 내부가 담장 바깥보다 3~4m 이상 높게 조성되었다.

왕궁리유적 전경

이와 같은 공간 조성은 중앙부를 높게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높은 대지 위에 만들어진 건물이 궁장 밖에서 보면 더욱 장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왕궁리유적은 1976년 이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그 전모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왕궁관련 시설, 금과 유리 등을 생산하는 공방시설, 사찰로 구성되어 있다. 왕궁관련 시설은 장방형의 석축 궁장을 비롯하여 동서석축, 건물지등이다. 특히 정전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가 발견되어 백제 왕궁 구조 및 공간구획의 원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건물지는 부여의 관북리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왕궁은 뒤에 그 기능이 사찰로 바뀌었는데, 사찰로 기능이 바뀌는 시기에 대해선 백제 말기(7세기 중엽)~통일신라 초기(7세기 후엽)라는 이견이 존재한다. 현재 남아있는 오층석탑이 이를 보여준다.

궁장(宮墻)

궁궐(宮闕)을 보호하기 위한 담장이다. 궁장의 규모는 동벽 492.8m, 서벽 490.3m, 남벽 234.1m, 북벽 241.4m인 장방형이다. 궁장의 폭은 3~3.6m이다. 부속시설로는 수구(水口), 석축배수로, 암거, 문지 4개소가 확인되었다. 동벽의 남측 부분을 통해서 확인된 궁장의 구조는 2단의 석축이 높이 1m 정도 남아 있었는데 그 위에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왕궁의 내부 공간을 보면 남측에는 의례, 정치와 관련된 건물지가 있고 북측에는 휴게 공간인 정원(후원), 수공업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왕궁은 전체적으로 2:1 또는 1:1의 비례를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궁장의 남북(492.8m, 490.3m)과 동서(234.1m, 241.4m) 길이는 2:1이다. 왕궁 내부 공간은 남측 공간과 북측 공간을 1:1로 분할하여 활용하였다. 이처럼 왕궁의 남측에 중요 생활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두는 구조는 중국과 일본의 고대 왕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왕궁리유적은 고대 동아시아인들이 왕궁건설의 원리와 기술을 활발히 교류하고 공유하였음을 보여준다.

석축(石築)

건물이 들어설 평탄면을 확보하기 위한 시설로서, 궁성 내부의 공간을 일정한 비율로 구획하였다. 동서 석축 4개소, 남북 석축 2개소가 확인되었다. 석축은 잘 다듬어진 석재를 정연하게 쌓고 점토와 잡석을 사용하여 뒷채움을 하였다. 현재 2m(6~7단) 정도가 남아 있다. 남측 공간은 4단의 석축을 쌓아 4개의 공간으로 구획하였다. 각각의 규모는 그 폭이 남쪽에서부터 76.6m, 44.5m, 72.3m, 45.7m로서 대략 2:1:2:1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석축의 높이는 제1 동서석축이 2m 정도이며, 나머지는 0.5m에서 1m 정도이다. 제1 동서석축은 다른 석축에 비해 높게 만들어졌다. 왕궁리유적은 규모나 공간의 활용 과정에서 2:1 또는 1:1이라는 비례개념을 염두에 두고 건립되었다. 이는 이 유적이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되었음을 보여준다.

대형 건물지

정전 건물로 추정되는 대형건물지(동서 35m × 남북 18.3m)는 제1 동서석축 바로 앞에서 확인되었다. 이 대형 건물지는 부여 관북리유적에서 확인된 대형 건물지와 유사하며, 왕궁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이 건물지는 왕궁의 중심축에 위치하며, 건물을 최대한 제1 동서석축 쪽으로 편재시켜 중문에서부터 건물까지 조회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였다. 이 건물은 정전 성격의 중층 건물로 추정된다.

와적기단 건물지

동서석축 3 바로 앞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그 기단 구축방법이 기와를 평적한 와적수법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와적기단은 부여지역의 백제시대 왕궁 유적과 사찰유적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된다.

정원(庭園)

왕궁의 북측 부분에서는 정원과 관련된 시설이 발견되었다. 정원은 물을 가두어두는 연못 형태가 아니라 기암괴석과 장대석, 강자갈을 이용하여 주변의 자연경관을 축소해 만들고 물이 흐르게 한 형태이다. 정원에 물을 끌어오기 위한 저수조, 물을 흘려보내면서 완상하는 중심시설, 수조의 수량 조절을 위한 암거배수시설, 정원에서 나온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 출입시설과 정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원 북쪽의 후원에서는 정원으로 공급하는 물을 집수하기 위한 U자형의 환수구와 곡수로가 발견되었다.
백제의 정원이 일본의 정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역사 기록에 나와 있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왕궁리유적에서 사비시대의 왕궁 정원이 발견됨으로써 중국-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정원문화의 교류양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궁리 정원에서 발견된 기암괴석 중에는 태호석, 혹은 어린석이라고 불리는 중국산 수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보여준다.

공방과 생활관련 시설

왕궁리유적에서는 금제품, 은제품, 유리제품 및 그 원료, 도가니, 슬래그, 송풍관 등 다양한 종류의 생산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왕성 내부에 왕실 직속의 수공업 공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방지 남쪽에서는 대형의 화장실 3기가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1호 대형화장실의 규모는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이다. 이 대형화장실 유구는 왕성 내에 거주하였던 관리나 궁인들이 사용한 것이다. 고대의 대형 화장실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며 이웃한 일본의 화장실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사찰관련 시설

왕궁리유적은 처음 축조될 때에는 왕궁이었다. 그런데 7세기에 이 왕궁의 용도는 사찰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사찰로 전용되는 과정에 탑, 금당, 강당 등 중요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 한정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활용하였다. 사찰로 용도가 변화한 정확한 시기에 대하여서는 학문적으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 석탑을 비롯한 사찰 관련 시설들에 대하여서는 설명을 생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