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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역사유적지구  사비시대(부여)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인이 아끼고 보존하는 세계유산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서브비쥬얼

금제관식 (무령왕릉 출토) 금제뒤꽃이(무령왕릉 출토) 허리띠장식(무령왕릉 출토) 금동제신발(무령왕릉 출토)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에 대해서는 1980년부터 본격적인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었다.
30년이 넘는 장기간의 계획적인 고고학적 조사 결과 백제의 왕성구조에 대한 해명이 대부분 이루어졌다.

이 일대를 왕성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첫째, 왕궁의 시설물로 볼 수 있는 면적 650㎡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과 남북방향으로 일직선 위에 위치한 부소산 중턱의 한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띠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왕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품이므로 이 일대가 왕의 생활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가장 위계가 높은 관청에 사용된 ‘수부(首府)명’ 기와, 대형 석조, 당나라 장군 유인원의 행적을 기념한 비가 모두 이 일대에서 발견된 점도 이곳이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셋째,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는 이곳에 지방을 통치하는 중요 관청을 건립한다. 이때 백제시대 건물의 하부구조가 새로운 관청 건축에 재활용되었다. 이 점도 이곳이 백제의 왕성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왕궁의 배후 산성인 부소산성의 남쪽으로는 대규모 건물이 들어서기에 평탄한 지형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사비에서 이곳이 왕궁이 입지하기에 가장 좋은 지형이다.

관북리유적

대형 건물지 <동서 35m × 남북 18.5m>

군창지

대형 건물지는 규모와 구조를 볼 때 왕궁 내에 배치된 건물 중 가장 중요한 전각 건물이다. 거의 같은 규모와 구조의 건물이 익산 왕궁리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건물의 기단은 위와 아래 2단으로 조성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50cm 정도이다. 기단의 북서쪽 모서리에 한 변 길이 77cm의 방형 주춧돌 하나가 남아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주춧돌은 사라졌지만 기둥과 주춧돌을 받히던 하부의 흙다짐기초가 총 36개 발견되었다.

상수도시설

물을 담을 수 있는 4m 크기의 대형 목곽수조 2곳이 발견되었다. 수조에서 불순물을 여과한 후 40m 정도 길이로 연결된 수도관을 통해 필요한 만큼 물이 흘러가게 된다. 목곽 수조의 기능은 물을 모으는 기능과 여과하는 기능 두 가지이다. 수도관은 수키와 2매를 원통형으로 맞대어 연결시켰다.

저장시설

저장시설은 목곽고 5기, 석실고 3기,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저장시설 내부에서는 다양한 식물유체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종류는 참외, 다래, 복숭아, 살구, 수세미, 오이 등인데 엄청나게 많은 양의 참외씨앗이 발견되었다. 저장시설은 대부분 식물성 음식물을 보관하고 저장하는 기능을 하였다. 1호 목곽고의 경우 약 8㎡ 규모의 장방형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각목과 판목으로 목곽을 짜 맞춘 것으로 확인되었다.

연못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연못이 발견되었다. 그 규모는 동서 10.6m, 남북 6.2m이며 평면은 장방형이다. 1~1.2m 정도 깊이로 땅을 파내고 가공된 석재를 5~6단 쌓아서 만들었다. 연못의 북쪽으로는 기와를 이용하여 만든 수로가 발견되었다. 이 수로는 연못에 물을 넣는 입수시설로 추정된다. 연못 내부에서는 연꽃잎과 줄기가 발견되어 연지(蓮池)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백제시대의 기와, 토기, 목간, 짚신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관북리 일대의 기타 유구

이밖에도 관북리유적에는 백제시대의 건물지, 도로, 석축, 공방시설 등의 유구가 존재한다.

부소산성

부소산성-봄- 남쪽 성곽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기 왕궁의 배후산성이다.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위급할 때에는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서쪽으로는 백마강을 끼고 부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표고 106m의 부소산 정상에 축조되었다. 산성 내부에서는 많은 수의 건물지가 발견되었고,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도 이 안에 있다.
1993~1994년에 걸쳐 실시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계곡을 품으면서 외곽을 두르는 백제시대 성벽, 그리고 그 안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 ~ 조선시대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백제시대 산성의 전체 길이는 외곽선을 기준으로 2,495m이며, 바닥의 너비는 5~6m, 높이는 3m 내외이다.
성벽의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대통(大通)’명 기와를 비롯한 유물을 근거로 하면 부소산성은 사비시대 이전인 웅진시대부터 성벽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통’은 중국 양나라의 연호(527~529년)이다. 이 연호가 사용된 시기는 부여로 천도한 538년보다 10년 정도 앞선다.

부소산 폐사지(서복사지)

부소산의 서남부 언덕에 위치하며, 기록에는 그 내용이 남아 있지 않은 백제시대 사찰이다. 1980년에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져 약 3,500㎡에 달하는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가람배치는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이며, 특이하게 강당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비시대 대부분의 절터는 평지나 나지막한 약한 경사지에 자리잡는데, 이 절터는 산의 능선을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특이하다. 이러한 지형 조건으로 인해 서남쪽으로는 금강이, 동남쪽으로는 부여 시가지가 잘 조망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제 허리띠, 연화문 와당, 인장와, 금동풍탁, 소조불상, 치미 등이 있다. 금동제 허리띠는 일본 나라현에 있는 정창원 소장품과 유사하다. 매우 잘 가공된 석재들로 기단을 구축한 점, 최고 신분의 인물이 사용한 금동제 허리띠 등을 볼 때, 왕을 위한 사찰인 것 같다.

이하에서는 산성의 주요 시설들에 대하여 백제시대 유구를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이른바 판축기법인데, 이러한 판축기법은 뒤에 설명할 나성의 축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축조 과정을 보면 먼저 토사(土砂)가 밀리지 않게 지탱할 나무를 두 줄로 세우고 그 안쪽에 점질토와 마사토를 번갈아가며 다져서 성을 만들었다. 바깥쪽으로는 급한 경사로 말미암아 성이 밀려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할석을 이용해 간단한 석축시설로 보강하였다. 그리고 중심 토루 안쪽에는 보강용 다짐층을 쌓아 완성했다.
문지(門址)는 남문지와 동문지, 두 군데가 확인되었다. 이 중 남문지는 산성의 정문이다. 백제시대 병영으로 사용했던 수혈주거지가 산성 내부 서남편에서 3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 제3호 주거지는 한 변의 길이 4m, 깊이 90㎝ 내외이며 내부에 온돌이 설치되었다. 내부에서 금으로 만든 봉황장식, 와당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산성 내부에는 백제~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건물지 12기, 석축, 저수조, 목책열 등 다양한 유구가 노출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장기간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시설들은 부소산성이 처음 만들어진 이후 1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